히말라야의 남쪽에 위치한 마날리(Manali)는 7월에 들어서며 이미 몬순의 영향을 받고 있어 아침나절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여 다음 목적지인 참바(Chamba) 지역에 위치한 힌두교에서 얘기하는 12 카일라스의 하나인 마니 말레쉬 카일라스를 가기위해 수일을 마날리에 머물며 한국 음식도 오랜만에 먹고 온천도 하며 휴식을 취하였는데 그 중간에 온전히 하루
시간을 내어 마날리에서 쿨루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약 20키로 떨어진 나가르(Nagar)에 위치한 "히말라야의 위대한 스승(Master of Moutains)"이라 불리는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Roerich, 1874-1947) 기념관을 방문하였는데 정말로 보람있고 뜻있는 시간이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7년(?)도인가 북인도를 여행하다가 어떤 잡지에서 그분에 대한 글을 읽고 감명 깊어 자료를 찾아보니 엄청나고 대단한 분이고 또한 마날리 근처 나가르에 생전 그분의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길래 꼭 들르리라고 생각했었기에 더욱 흥분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다양하고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분으로 화가이자 극작가,사상가이자 철학자,작가,과학자,탐험가등으로도 불릴 정도의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저 개인적으로는 화가로서의 그 분을 가장 좋아합니다.
또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히말라야와 그 주변을 탐험하고 여행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 업적을 위해 약탈을 일삼은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과 더불어 진정으로 히말라야와 그 주변을 사랑한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이가 들면서는 히말라야의 서쪽 나가르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쳤지만 실제로는 히말라야의 동쪽 시킴에 위치한 칸첸충가를 가장 좋아했다 합니다.
하여 시킴에도 그분의 흔적이 있으며 그분의 사후 그분의 아내 헬레나(Helena,1879-1955)는 나가르를 떠나 1962년 시킴이 인도에 합병되면서 인도의 서 벵갈주에 속하게 되는 깔림뽕이란 나가르와 비슷하게 히말라야의 중산간에 자리잡은 소도시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둘째 아들 스바토슬라브(1904-1993) 또한 인도의 벵갈로르에서 교수와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의 둘째 며느리 데비카(1908-1994)는 유명한 인도 은막의 스타이자 시성 타고르의 종손녀였다고 합니다.
그분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러시아 페테르부루그에서 아버지가 변호사이자 공증인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예술적인 분위기를 접하며 성장하여 미술대학을 졸업한 1897년 무렵엔 이미 상당한 명성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법학과 건축학도 공부하였지만 주로 화가로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아 가던중 1900년 아내 헬레나를 만나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고 그 후 파리를 비릇한 유럽 각지를 오가며 전시회를 여는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그의 전시회에는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가 들를 정도였습니다.
1905년경 부터는 아내 헬레나의 영향으로 동양 특히 인도의 종교,철학,사상,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서서히 인도와 히말라야에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 문학에서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영향을 받아 교우를 하면서 그의 평화 사상에도 동조하여 제 1차 세계대전과 조국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등의 거친 시대를 지나며 지속적으로 재단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세계 평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공로로 1929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합니다.
1920년대에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당시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비릇한 유명인사들과 교류하며 더욱 명성을 쌓아가게 되고 이무렵인 1923년에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당시 시킴 왕국의 일부였던 다르질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히말라야와 티벳 고원 그리고 중앙 아시아 오지 탐험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후 1920년대 후반 약 4년간을 아들과 더불어 히말라야와 트랜스 히말라야 일대, 몽골과 알타이 산맥을 포함한 중앙 아시아 일대, 티벳 고원등을 여행한 후 히말라야의 서쪽 나가르에 정착하여 가끔 미국을 오가며 저술과 그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후로도 수시로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며 동식물,민속 및 문화,광물등에 대해 계속 연구하며 1930년대 초에는 리서치 센터(Urusvati Himalayan Research Institute)도 설립하여 수많은 소장품들과 수집품들을 보관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그의 기념관 위쪽 별도의 건물에 보관 전시되어 많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1920년대 초 조국 러시아를 떠난 뒤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을 여행중 카쉬카르 주재 러시아 영사의 호의로 이미 소비에트로 변한 조국 러시아를 딱 한번 마지막으로 방문하게 되고 그 후 1946년 죽기 1년전 러시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으나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등 여러가지로 실행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 사망하게 되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그도 행복하지 만은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들어서는 당시의 네루 수상과 더불어 인도-러시아 친선을 위해 노력하며 인도에 거의 동화되는데 아그니 요가라는 요가의 한 분파를 창시하기도 하는 등 명상과 정신적인 수련에 더욱 정진하여 샴발라(Shambala)라는 신비주의적인 책도 쓰게 되는데 이 책은 주로 티벳 밀교의 정신 수련에 관한 책으로 샴발라의 사전적인 의미는 "티벳의 오지에 존재한다고 전설처럼 전해오는 불교의 이상향 혹은 성스러운 도시"로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잃어버린 지평선"의 "샹그리라"라는 말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드디어 시간의 수레바퀴가 그에게 죽음을 안겨주어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렸다고 할만한 73세의 나이로 1947년 12월 13일 사망하여 집 바로 아래의 양지바른 곳에서 화장되고 그가 화장된 자리에는 하나의 큰 돌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힌디어로 묘비명이 적혀있는데 그 뜻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도인의 위대한 친구 마하라쉬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육신은 1947년 12월 15일 바로 이곳에서 불로 봉헌되었다 "
그의 사후 많은 후학들이 그를 기려 재단을 설립하여 그의 사상과 업적을 더욱 계승 발전키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인도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인도 화폐 1루피 동전에 그의 초상을 새겨넣을 정도 였습니다.
저도 기념관을 떠나며 영인본으로 된 그림 세트와 1930년에 미국에서 초판 출간되어 2003년에 다시 출간된 샴발라 한권을 기념으로 사와 읽어 볼려고 하였으나 언어의 한계와 내용의 난해함으로 아직도 숙제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1.봄에 시킴을 한달간 여행 하였는데 그곳에서도 로에리치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는 인연을 만났으나 아쉽게도 도착 직전에 전시회가 끝나버려 스치기만 한 인연이 되고 말아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로에리치 기념관의 입구
꽃과 짙은 숲으로 둘러쌓인 기념관
전시관과 리서치 센터의 이모저모, 마지막 그림의 제목은 칸첸충가입니다.
로에리치의 묘비
제가 로에리치의 그림을 생각하며 서 시킴의 펠링에서 찍어본 칸첸충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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