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9 .4(화)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 뿌야오샹차이(不要香菜)를 외치면서 대한 중국음식은 아직 접근하기에는 난적이었습니다.
식후 돈황의 대표적 유적인 막고굴(莫古窟)을 답사하기 위하여 가면서 본 돈황시가지와 주변은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낙후된 모습이었으나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명사산의 한쪽 기슭에 수,당,송 시대를 전후해 수백년에 걸쳐 조성된 수백개의 석굴 중 관람이 허용된 약20여 개의 석굴을 한국어가 유창한 가이드를 따라 둘러 보면서 불상과 벽화의 화려한 색채와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못하였으며 특히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제17굴(일명 장경동)에서는 남다른 감회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막고굴은 아직도 수 많은 연구 대상이 있어 불교와 불교미술사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서구에서는 "돈황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야가 생길 정도라고 하니 문외한의 눈이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여러 다른 유적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영국의 지리학자 스타인,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일본의 오오타니등에 의해 많은 문화재의 반출과 파괴가 자행된 흔적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이중 아이러니칼하게도 오오타니 컬렉션의 상당부분이 우리나라의 서울에 있는데 사연은 이러합니다.
오오타니가 자기가 발굴해서 가져온 유물의 상당부분을 당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게 되는데 이 유물들이 일본이 패망하면서 가져가지 못하게 되어 우리나라에 남게 되어 지금도 귀중한연구 자료로 쓰인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됩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돈황시내로 들어와서 돈황박물관을 관람하였는데 고대로 부터 출토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연이 있음직한 북한 사투리의 준수한 청년이 머나먼 이곳에서 박물관직원으로 일하고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동쪽 즉 북경쪽으로 약500Km 정도 떨어진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 부근의 주천시(酒泉)로 가기위해 승합차에 올라 고비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끝이 없을 것 같은 광대함과 황량함 그리고 우측에 만년설을 인 기련산맥을 따라 한줄기 난 길에서 안서와 유원등의 오아시스 마을을 거쳐 사막의 낙조를 보며 밤늦게 주천빈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중 안서는 한때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 장군이 안서 도호부의 책임자로 당나라의 서역 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한곳이라 가슴이 싸해짐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피곤한 몸에도 저녁늦게 시내에 나가보니 이 일대는 지리적으로 서역으로 가는 길목이자 실크로드의 중요 부분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중심도시로써 한나라때 부터 아주 중요시 되는 곳으로 현재도 주변의 철광석과 서부대개발 정책의 영향으로 수많은 건축이 진행되고 사람들도 매우 활기차 보였습니다.
또한 기련산맥에서 나는 특이한 돌로 만든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야광배(夜光盃)의 화려함이 눈에 띄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막고굴 전경
막고굴에서 가장 큰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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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에서 주천가는 길 주변의 고비사막의 풍경과 주변의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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